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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대전으로: 낚시, 도둑질, 그리고 성장의 이야기"

myblog6224 2024. 8. 29. 07:22

 

초등학교 5학년 때 대전으로 이사를 했다. 시골집은 방 2칸에 마루가 연결되어 있었고 부엌이 따로 있고 연탄보일러와 아궁이 구들장을 함께 사용했다 화장실 외양간 옆에 붙어 있었는데 마당 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여러분은 화장실에서 큰일을 볼 때 똥물이 튀어 엉덩이에 묻은 기억이 있는가? 똥이 탑처럼 쌓여 조금씩 조금씩 나와 가까워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여물을 끊이고 꼴(소먹이 풀, 방언)을 베어다 소에게 주고 학교 갔다 오면 책가방을 마루에 집어던지며 조건 반사적으로 둥그나 무(마을 입구의 큰 느티나무)에 모여 아이들과 작당모의를 했다. “오늘은 낚시 가자~”의견이 모아지면 일사천리로 각자 움직인다. 낚싯대도 줄도 낚시 바들도 없고, 심지어 미끼도 없다.

 

낚싯대를 만들기 위해 앞 산으로 낫을 하나 들고 간다. 마음에 드는 대나무를 발견하는 순간 나 이거하며 낫질을 하고 몇 번의 몸동작으로 대나무는 근사한 낚싯대로 변해있다.

줄은 안방에 들어가 실타래를 풀어 10m 정도를 잘라 대나무 끝에 힘껏 묶고 철사를 텔레비전에서 본 낚싯바늘을 상기하며 끝을 열심히 갈고 구부려 그럴듯하게 만들어 실에 묶는다.

 

낚싯대가 이렇게 완성이 되면 파리, 잠자리는 그날의 미끼가 된다.

물고기를 몇 마리 잡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누구의 도움도 질문도 없이 서로 이야기해 놀 거리를 찾고 모두의 의견을 존중하고 위해준다.

 

이렇게 지내던 내가 대전이라는 곳 이사 와 보니 보는 것, 하는 것마다 깜놀이다.

전학 신청을 하고 배정받은 교실로 들어갔다. 머리는 5:5가르마를 타고 얼굴은 허여면서 이목구비는 비교적 뚜렷해 딱 기생오라비같이 생기고 키가 나보다 5cm 정도 작았던 거 같다.

껄렁껄렁한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야 저 전학생이야? 조용히 지내라하고 지나간다.

이건 뭐지? 저 새끼 뭐야?’하는 찰나 종이 쳤고 선생님이 들어와 내 소개를 해주셨다.

전학을 다녀본 사람들은 알 거다 처음 등교하는 날 설렘 반 두려움 반하는 마음과 누군가 처음 나에게 호의를 베풀었을 때 그 친구가 얼마나 고맙고 또 친해지고 싶은지 말이다.

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리기 무섭게 한 친구가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어디서 왔어? 나 송인성이라고 해 반갑다. 나랑 같이 놀래?”

 

얼굴은 까무잡잡하고 눈이 쭉 찢어져 날카로워 보였고 몸집도 호리호리해 운동을 아주 잘하게 생긴 친구였다. 나에게 처음으로 놀자고 말해준 친구다. 난 바로 인성이와 친구가 되었다. 집도 가까워 수업을 마치고 같이 집에 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인성이를 알게 되면서 함께 노는 무리가 자연스럽게 생겼다. 제일 먼저 간 곳이 오락실이다. 그때까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곳, 신세계였다. 자연스럽게 아니 급속도로 빠져 들어갔다. 매일 학교 갔다 오면 출근 도장을 찍었다. 오락실에 있는 동안은 시간과 돈이 어떻게 지나가고 나가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무언가에 빠져본 것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혼자가 아닌 친구들과 함께하는 사실 또한 너무도 신나는 일이었다.

학교에서 봄 소풍을 간다는 공지가 있던 날 어김없이 오락실에 모였다.

 

한 친구가 곧 소풍인데 간식 구하러 가자는 말을 했고 도통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함께 따라나섰다.

한참을 걸어 어느 한 슈퍼마켓에 다다랐을 때 나보고 망을 보고 있으란다. “”, “무슨 소리야?”, “누가 오면 말해달라고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 친구가 담을 넘었다. 슈퍼마켓은 가정집을 리모델링 했는데 뒤 담장이 높지 않아 담 안쪽에 쌓아놓은 콜라 1.5L 음료수가 밖에서도 훤히 보였다. 잠시 후 음료수가 담을 넘어왔다.

 

밖에서 대기하던 친구들은 콜라 1.5L 음료수를 받자마자 어디론가 몸을 숨겼고 담을 넘은 친구가 다시 돌아오는데 걸린 시간은 3분이 채 안 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망을 보고 있는 내내 심장이 터질 듯했고 오금이 저려왔다. 온몸이 떨리고 땀이 나기 시작했지만 친구들에게 쪽팔리기 싫어서 태연한척하려고 다리에 힘을 주고 주먹을 꽉 쥐고 주변을 하염없이 둘러봤다. ‘아 누가 오면 어쩌지? 주인집 아저씨라도 나타나면? ~~~’그렇게 3분이 지난 것이다.

 

나에게는 30시간처럼 느껴졌던 시간, 5살 때였던가 아버지 양복 주머니에서 5백 원을 몰래 훔쳐 내가 대장이니 동네 아이들에게 과자를 사줬다가 맞아본 후 처음으로 도둑질에 가담했던 날이었다.

오락실 다니는 일, 남의 물건을 훔치는 일이 반복될수록 이 일에 익숙해졌다. 내 심장이 어떤 동요도 없이 평상시와 같았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나도 즐기고 있는 것을 느낄 때쯤 엄마가 나를 불러 앉혔다.

 

지금 어떤 친구들을 만나고 있고 뭘 하고 다니냐고 물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고개만 푹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이노무자식 엄마, 아빠가 누구 하나 제대로 키워보겠다고 아무도 알지 못하는 타지에 나와 막노동하고 식당에서 물뭍이며 일하고 있는데 넌 오락실에 도둑질까지 해가며 이렇게 지낼 거야?”엄마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금세 방바닥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었던 매, 그 매 마저 아들의 종아리를 때릴 수 없었던 그때 난 엄마가 한 말씀이 머릿속에서 잊혀지지 않고 각인된 채 30여 년을 살았다.

 

너무 미안했다. 죽고 싶었다. 이것 이외엔 떠오르는 생각이 없었다. 난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속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엄마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게요"어렵게 입을 열었고 엄마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주방으로 가셨다. 그 모습마저 바라볼 수 없었다 엄마가 일어나시고 난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많은 생각은 없었던 거 같다.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랐고 또 민망하기도 했다.

난 한동안 오락실은 가지 않았고 도둑질은 꿈에서도 하지 않았다.

내 머릿속엔 온통착한 아들, 성실한 아들이 되어야 한다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 다른 생각들은 철저히 차단하며 더욱더 나에게 채찍을 가했고 그날 이후로 착하고 성실한 이미지는 나의 가장 큰 강점이자 제약이 되었다.

아버지는 아침에 일어나면 보이지 않으셨다. 저녁에도 늦게서야 집에 들어오시곤 했는데 들어오실 때면 검게 그을린 얼굴에 때론 흙과 시멘트 등이 묻어있곤 했고 옷과 신발은 깨끗한 적이 없었다.

 

가방을 내려놓거나 씻기 위해 옷을 벗을 때면 아이고하는 신음을 내곤 했고 식사 후에는 말하지 않아도 엄마가 있을 때를 제외하곤 허리와 어깨에 파스를 붙이고 일찍 잠을 청하셨다.

엄마는 대원 제지라는 대전에서는 제법 큰 제지 회사의 식당에 8년을 다니셨다

나를 비롯 우리 6남매가 나쁜 길로 갈 수 없었던 이유, 바로 밤낮없이 오매불망 자식을 위해 먹고 싶은 것 안 먹고 입고 싶은 것 안 입으시며 지냈다. 지금도 그때의 습관 때문인지 밖에서 외식 한 번 하지 않으시고 당신들 손으로 옷이나 액세서리 등을 사본 적이 없으시다.

 

자식이 없을 때는 한겨울에도 온수로 씻으시는 일이 없고 난방도 틀지 않는다. 그렇게 아껴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셨으니 어찌 자식들이 곧고 바르게 자라지 않을 수 있을까? 나 또한 비록 나쁜 짓도 하고 청소년기에 방황도 했지만 결론적으로 다시 제자리로 올 수 있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부모님들의 헌신과 사랑을 보며 자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난 초등학교 5학년까지 자연이라는 커다란 놀이터에서 원 없이 놀았다. 어린이집, 유치원은 있는지도 몰랐고 초등학교는 입학 당시 1학년이 11명이었다. 2학년 때 바로 분교가 되었고 5, 6학년 형 누나들과 한 반에서 같이 공부를 했다. 운동회는 온 동네잔치였고 소풍은 자연탐구 시간이었다.

개구리. 물고기, 가재, 뱀을 잡으며 놀았고 봄에는 나물을 캐고, 여름엔 물속에서 살았으며 가을에는 온갖 과일들을 따먹으며 자연에서 직접 체험하며 공부를 했다. 겨울에는 냇가와 산을 가리지 않고 썰매를 타며 동상이 걸리는지도 모르게 놀았다.

 

이때 만들어진 정서가 아직도 나에게는 큰 힘이 되는 것 같다.

이따금 살아가는 순간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잊어버리거나 무심하게 받아들일 때가 많다. 특히 어린 나이의 시간과 경험 등은 깨달기가 어렵지 않나 생각이 든다. 내가 지금 이 위치에 있을 수 있었던 것 그것은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느냐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 여러분은 어떤한 과거의 경험으로 지금의 강점과 제약을 가지게 되었나요?

 

난 군 생활하면서 똑똑하고 스마트한 동료들과 함께 일하면서 여러 가지 경험을 해보았다. 그리고 좋은 머리, 훌륭한 집안, 명문대 및 사관학교 졸업이란 것에 안주한 채 그 이후의 경력을 거의 잊힌 계절로 만들어 버리는 경우도 보았다. 내가 과거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며 시골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5학년 때 겨우 대전으로 이사해 오락실 다니며 도둑질하고 하는 과거에 갇혀 살았다면 어땠을까? 이 과거를 끊지 못했다면 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